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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릉

나를 태워

당신의 이름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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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쿄쥬로의 눈에 담긴 불길은 혀를 낼름거리며 어머니의 물빛 기모노를 희롱하고 있었다. 수천으로 갈라진 불길의 가닥이 무릎 위에 포개어진 손부터 시작해 차례차례 그녀를 휘감았다. 어머니의 엷고 하얀 이마에서부터 흐른 땀방울이 하나둘씩 옷자락을 적셨다. 쿄쥬로는 초조하다 라는 단어의 의미를 그때 비로소 깨우칠 수 있었다. 불길에 몸이 삼켜져도 스러지지 않는 어머니의 반듯한 자태에 도리어 애가 타는 마음이 이를 뜻했다.    

 머리맡에서 들은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가장 처음으로 세상에 난 불은 어미의 배를 태워버리고 그녀를 황천으로 떠밀었으며 영영 불귀하게 만들었다. 인고의 결실이 되어야 하는 자식이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을 만들어낸 셈이었다. 옛 이야기가 불러일으키는 불안감이 원만한 굴곡으로 이루어진 어머니의 몸을 향했다. 쿄쥬로는 숨김없이 드러낸 저 자신의 시선을 불경하다 여겼으나 이를 거두고자 하는 의지는 별개의 일이었다. 낮게 흐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수심에 잠긴 그를 깨웠다.

-쿄쥬로,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고 있나요? -

 어머니는 어느새 그의 곁으로 몸을 옮기고 있었다. 부른 배를 한 손으로 받치고 쿄쥬로를 향해 다가오는 모습에 힘겨운 기색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녀가 균형을 잃을세라, 쿄쥬로는 어머니의 움직임을 만류하려 했다.

-어머니, 쿄쥬로는 괜찮습니다. 가벼운 고민에 잠겼을 뿐...  혹 제가 어머니에게 걱정거리를 안겨드린 것이라면 고개를 숙여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쿄쥬로, 그럴 필요는 전혀 없답니다. 오히려 무엇이 쿄쥬로의 마음을 이리 강하게 붙잡았길래 이름을 불러도 듣지 못한 것일까...하며 조그만 호기심이 이 어미를 그대 곁으로 이끌더군요.-

-어머니, 실은...송구스럽습니다. -

-절대로 쿄쥬로를 질책하려 꺼낸 말이 아닙니다. 어미 된 이로서 그러한 마음을 품는다면 언어도단이 분명하겠지요. 하지만 쿄쥬로, 사람의 마음은 망망한 바다와도 같아 때로는 깊이 고인 물을 강과 호수로 흘려보내야 하는 법이랍니다. 풍랑을 잠재우는 방도도 이와 같습니다.-

 어머니의 눈은 쿄쥬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거울과도 다름없었다. 온 사방이 고요하게 무르익은 가운데 어머니의 낮고 긴 숨소리가 작은 종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그러한 광경만으로도 첩첩이 쌓여 있는 수심이 서서히 걷히는 듯 했다. 일견 엄숙해보이는 태에 희미한 웃음을 걸치는 어머니를 바라보던 쿄쥬로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는... 불길이 이따금 어머니를 집어삼킬까 하여... 그것이 저를 망설이게 만듭니다.-

쿄쥬로는 그 말을 꺼낸 직후로 어머니의 표정을 살피려 하지 않았다. 불길을 혼에 새기는 과정을 통해 태어난 렌고쿠 가의 장자가 그였다. 저 자신의 마음 속에 자리한 두려움은 불을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서늘하리만치 사무쳤다. 숨을 가까스로 가다듬은 쿄쥬로의 머리 위로 손이 미풍처럼 살포시 얹혔다.

-쿄쥬로는 정말로 이 어미의 아들이 틀림없군요. 실은 저도 처음으로 쿄쥬로를 뱃속에 품었을 때 마음 속에 작은 불안이 자리했었답니다. 오로지 제 안에서만 삶을 지속하며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이 조그마한 불청객을 어미 또한 달가이 여기지 못했습니다. -

 오죽하면 신쥬로님께 소금과 팥을 반상에 올리는 것이 어떻겠느냐- 라고 말씀을 드릴까. 이런 고민도 했었지요. 어머니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던 쿄쥬로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몸을 들썩였다. 높낮이가 일정한 음색이 자아내는 소담은 아이의 웃음소리를 이끌어내는 데에 충분했다. 그들 앞의 불이 다시 한번 타닥 튀어오르며 흩어진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반갑지 않은 손님은 어느새 들여다보기도 전에 자리를 떠났답니다. 오랫동안 함구한 비밀이었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쿄쥬로에게 알려주고 싶습니다. 알고 싶으신가요? - 

이르게 끝맺은 어머니의 입가를 바라보며 쿄쥬로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는 어머니가 가진 따뜻한 무언가가 자신의 몸속으로 은밀하게 녹아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창해와 같은 마음을 지피는 낯선 존재는 어머니의 심상이었을지, 자신의 서툰 결심이였을지. 소소한 의문들이 그의 전신을 거세게 붙잡았다.

- 단지 불을 바라보는 행위만으로 바라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어미는 그리 생각합니다. 이는 불을 다스리는 신께 경애와 예의를 보이는 절차로 자연스레 피어나는 숭고한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요. 허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이랍니다. 타오르는 불을 가만히 두 눈에 담기보다 자신의 간절한 염원(念願)을 위해 무엇을 바칠 수 있는지, 어떤 각오를 해야하는지 매번 심사숙려해야합니다. 수백, 수천 번의 사색을 해야 한다면 마땅히 따라야 합니다. 그리하여 불꽃같은 염원(炎願)은 무엇이던 불사 할 수 있는 각오가 되어 마음의 그늘을 몰아내는 이치에 도달하게 되지요.-

오래도록 이어진 말에는 붉은 피와 붉은 마음이 담겨있었다. 어머니는 말씀을 계속하는 도중 입을 가리고 잔기침을 하였으나 강인한 언동이 그에 가려지는 일은 없었다. 열기와 불안을 품은 구름이 자욱하던 쿄쥬로의 마음에 순풍이 일었다. 한층 무게를 내려놓은 어조로 그는 마지막 남은 말을 그대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어머니, 어머니는 무엇을 바치기로 하셨나요?-

쿄쥬로는 동이 트길 기다리는 짙은 여명을 등지며 하염없이 과거의 주마등을 되짚고 있었다. 깊고 깊은 동경으로 가득찼던 유년을 떠올리며 제 몸이 마지막 화염을 토해내길 간절히 기도했다. 십수년 전의 자신이 건넨 질문에 어머니가 눈을 곱게 휘며 짧은 침묵과 간결한 답으로 응수한 기억이 눈 앞에 어룽거렸다. 쿄쥬로도 때가 지나면 스스로 찾게 될 것이랍니다...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고르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쿄쥬로는 모두가 고요히 잠들었던 엄동설한에 손바닥을 감싸며 초라한 모닥불을 피웠던 일을 천천히 회상했다. 그 날은 어머니가 몸 속에 괸 피를 견디다 못해 좌중 앞에서 처음으로 실신하는 변고가 일어났었다. 살을 에는 얼음장 같은 바람을 맞으며 불을 향해 기도하는 순간 그는 내내 되묻던 의문과 함께 공존하던 이치를 깨우칠 수 있었다.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기꺼이 생의 의미를 불태우는 이들이 있었다. 그 의미란 자신이 쌓아 올린 부귀영화이기도 하며, 때로는 명예 혹은 투지이기도 했다. 개중 가장 존귀한 재보나 다를 바 없는 목숨을 그 누가 쉽사리 바칠 수 있겠는가. 어머니가 목숨과 생을 불태워 찾아낸 불변의 진리는 어린 쿄쥬로의 손을 녹이고 마음에 이정표를 새겼다.어머니 당신이 홀로 짊어지고 갈 수 있던 비밀은 돌고돌아 쿄쥬로의 손에 들린 검을, 그의 마음을 하염없이 지폈다. 

 

그리하여 렌고쿠 쿄쥬로는 마지막에서야 자신의 이름(煉獄)을 태우며 생과 사의 경계에서 그를 고대하던 이와 해후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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